세상이 지옥이어서 우리가 아무리 선하려 해도, 이렇게 살아 있는 것만으로 우리는 이미 악마야. - p.97
바이러스나 핵폭발에 의한 지구 종말을 그린 소설은 차고 넘치게 많다.
그럼에도 과감하게 그 클리셰를 선택한 「해가 지는 곳으로」는 종말 그 자체가 아닌 그 속의 다른 무언가에 초점을 맞췄다.
당장 내일을 확신할 수 없다는 걸 빼면 소설 속과 현실에서의 삶이 다를 게 뭔가?
약육강식. 각자도생. 승자독식. 우리는 소설 속이 아니라도 이미 치열하고 숨 가쁘게 살고 있다.
무언가를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 잊고 있는 게 있을 텐데?
지킬 것을 지키고 경계할 것을 경계하고 함부로 사람을 믿지 않는 것.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하게 되더라도 수치심만은 간직하는 것. 오늘 내가 살아 있음에 의문을 품는 것. 한국에서의 삶이 그랬다. - p.99
프롤로그는 이야기의 끝에서 시작된다.
모든 것이 지나고 난 뒤 새 생명을 탄생시키고 거기에 평범하고 사랑스러운 이름도 지어줄 수 있을 때쯤.
류에게는 100마리 양 중 한 마리도 안된다던 러시아에서의 기억.
하지만 하루도 빠짐없이 기억한다는 그 한 마리의 이야기가 바로 이 소설이다.
류, 도리, 지나, 건지. 4명의 시점에서 소설은 바통터치하듯 이어진다.
가족이 제일 중요해서 가족과 함께할 시간을 포기했던 류,
미소를 홀로 남겨두지 않는 게 자신의 일이라던, 하지만 지나와 함께 하면서 사랑을 깨닫게 된 도리,
사람들은 싫지만 지나가 없는 세상에선 살 수 없다는 건지.
그들은 재앙 속에서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방법을 깨닫는다.
미루는 삶은 끝났다. 사랑한다고 말해야 한다. - p.100
빈구석이 많은 글을 쓰고 싶었다던 작가는 우리 몫으로 많은 걸 남겨두었다.
사람들이 어떻게 휴전선을 지나 러시아로 갔는지, 바이러스의 정체는 무엇인지,
전투기는 어디서 왔으며 뭘 하려 했던 건지 이렇다 할 설명 없이 소설이 끝난다.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계가 멸망해도 살아남은 사랑을 기억하자. 사랑은 온기와 낯섦, 혹은 익숙함을 나누는 것.
가족 외에는 아무것도 믿을 수 없는 절망의 구렁텅이 속에서도 단 하나 믿을 수 있는 것.
이야기는 사랑으로 귀결된다.
언니가 결혼을 하면 좋겠어.
(…)
무슨 일이 있어도 헤어지지 않겠다는 약속. 결혼할 때 그런 약속 하잖아.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 p.122
해가 지는 곳으로 - 최진영 지음/민음사 |
책 속 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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