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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소설

최진영 [해가 지는 곳으로] 책 리뷰

by 깐마느리 2018. 2. 2.

해가 지는 곳으로-최진영
「해가 지는 곳으로」 최진영, 민음사 <오늘의 젊은 작가 16>

 

 

 

 

 


 

 

 

 

 

 

세상이 지옥이어서 우리가 아무리 선하려 해도, 이렇게 살아 있는 것만으로 우리는 이미 악마야. - p.97

 

 

 

 

바이러스나 핵폭발에 의한 지구 종말을 그린 소설은 차고 넘치게 많다.

그럼에도 과감하게 그 클리셰를 선택한 「해가 지는 곳으로」는 종말 그 자체가 아닌 그 속의 다른 무언가에 초점을 맞췄다.

당장 내일을 확신할 수 없다는 걸 빼면 소설 속과 현실에서의 삶이 다를 게 뭔가?

약육강식. 각자도생. 승자독식. 우리는 소설 속이 아니라도 이미 치열하고 숨 가쁘게 살고 있다.

무언가를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 잊고 있는 게 있을 텐데?

 

 

 

 

 

지킬 것을 지키고 경계할 것을 경계하고 함부로 사람을 믿지 않는 것.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하게 되더라도 수치심만은 간직하는 것. 오늘 내가 살아 있음에 의문을 품는 것. 한국에서의 삶이 그랬다. - p.99

 

 

 

프롤로그는 이야기의 끝에서 시작된다.

모든 것이 지나고 난 뒤 새 생명을 탄생시키고 거기에 평범하고 사랑스러운 이름도 지어줄 수 있을 때쯤.

류에게는 100마리 양 중 한 마리도 안된다던 러시아에서의 기억.

하지만 하루도 빠짐없이 기억한다는 그 한 마리의 이야기가 바로 이 소설이다.

 

 

 

 

 

류, 도리, 지나, 건지. 4명의 시점에서 소설은 바통터치하듯 이어진다.

가족이 제일 중요해서 가족과 함께할 시간을 포기했던 ,

미소를 홀로 남겨두지 않는 게 자신의 일이라던, 하지만 지나와 함께 하면서 사랑을 깨닫게 된 도리,

사람들은 싫지만 지나가 없는 세상에선 살 수 없다는 건지.

그들은 재앙 속에서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방법을 깨닫는다.

 

 

 

 

미루는 삶은 끝났다. 사랑한다고 말해야 한다. - p.100

 

 

 

 

빈구석이 많은 글을 쓰고 싶었다던 작가는 우리 몫으로 많은 걸 남겨두었다.

사람들이 어떻게 휴전선을 지나 러시아로 갔는지, 바이러스의 정체는 무엇인지,

전투기는 어디서 왔으며 뭘 하려 했던 건지 이렇다 할 설명 없이 소설이 끝난다.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계가 멸망해도 살아남은 사랑을 기억하자. 사랑은 온기와 낯섦, 혹은 익숙함을 나누는 것.

가족 외에는 아무것도 믿을 수 없는 절망의 구렁텅이 속에서도 단 하나 믿을 수 있는 것.

 

이야기는 사랑으로 귀결된다.

 

 

 

언니가 결혼을 하면 좋겠어.

 

(…)

 

무슨 일이 있어도 헤어지지 않겠다는 약속. 결혼할 때 그런 약속 하잖아.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 p.122

 

 

 

 

 

 

해가 지는 곳으로 - 8점
최진영 지음/민음사

 

 

 

 

 

 

 


 

 

 

 

 

 

책 속 구절

죽는 순간 나는 미소에게 무슨 부탁을 할 수 있을까. 사랑해. 사랑을 부탁할 것이다. 내 사랑을 부탁받은 미소는 어떻게든 살아남을 것이다. 사랑을 품고 세상의 끝까지 돌진할 것이다. - p.17
 

 

재앙을 기회로 여기는 사람들. 재앙에도 굶지 않고 뛰지 않는 사람들. 그들의 세계는 저승보다 먼 곳에 있을 것이다. - p.18
 

 

분명 겪은 일인데 지난 일 같지 않다. 미래 같다. 앞으로 수 없이 겪게 될 일 같다. - p.48
 

 

기적은 없다. 기적이 정말 있다면 등장할 기회를 놓쳤다. - p.56

 


 
 
문장이 칼날처럼 다가왔다. 단어 하나하나가 거대한 바윗덩이처럼 눈앞으로 굴러떨어졌다. 짧은 한 줄인데도 의미를 삼킬 수가 없었다. - p.60
 

 

태어나 익힌 모든 감정과 마음이 뒤섞였다. 그것들 중 하나를 찾아 헤맸다. 이것에 가까운 감정을 내가 아는가. - p.72
 

 

꼭 나의 너 같네.
응?
내용은 모르지만 자꾸 생각나는 거. - p.79

 


 
 
우리만 모르는 해답을 다른 이들은 찾아낸 것 아닐까. 살아남은 모든 사람이 이런 식으로 시간을 허비하고 있을 리 없지 않은가. - p.87

 


 
 
나라는 사람이 흐트러진 퍼즐 같았다. 애초의 내가 어땠는지 밑그림은 기억나지 않았고 퍼즐은 흩어진 채 여기저기 떠돌았다. 무언가 미세하게 어긋나고 있어서 먼 훗날 완벽하게 분리될 것만 같았다. - p.90

 


 
 
잘 살고 있는 것일까. 언제부터 시작된 질문인지 모르겠다. 잘 살 수 있을까. 그 질문부터 시작되었던 것 같다. - p.93
 

 

고독 같은 것. 같잖고 우스워 갖다 버리려 해도 검은 옷에 들러붙는 하얀 먼지처럼 자꾸 따라와 날 성가시게 하는 지독한 감정. 무섭다 못해 지겨웠다. 너무 들러붙어 내가 곧 그것 같았다. - p.103
 

 

눈이 그쳤다. 두려움이 사라졌다. 사라진 자리에 체념이 생긴 건지도. 접어서 보이지 않게 할 수 있다면 걱정도 조금쯤 접어 두고 싶었다. - p.110
 

 

평생 단 한 사람은 있을 것이다. 내 인생의 A, B, C가 아니라 완벽한 고유명사로 기억될 사람이. - p.171
 

 

그 밤 이후 나의 세계는 지구보다 우주. 우주에는 소리가 없다. 소리 없이도 우주는 완벽하다. 하늘 높이 나는 꿈을 꾸고 우주인이 되었기 때문에 나는 소리를 잃었다. - p.176
 

 

경험과 깨달음에는 시차가 존재한다. - p.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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