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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소설

김애란 [비행운] 책 리뷰

by 깐마느리 2018. 2. 2.

비행운-김애란
김애란 - 「비행운」, 문학과지성사

 

 


 

 

 

 

어느 날 자리에서 눈을 떠보니 시시한 인간이 돼 있던 거다. 아무것도 되지 않은 채. 어쩌면 앞으로도 영원히 이 이상이 될 수 없을 거란 불안을 안고. - p.251

 

 

 

 

 

「비행운」은 어딘가 끈적끈적하고 우울한 내용의 단편소설로 가득 채워진 책이다.

어떤 이야기는 화자가 미쳐버린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히스테릭한 행동을 보이거나 극적인 일들이 일어나는가 하면

다른 이야기는 마치 내가 다른 사람의 일기를 훔쳐보고 있는 건가 싶을 정도로

현실감있는 소재와 전개로 내게 더욱 비참하고 씁쓸한 기분을 맛보게 했다.

 

 

 

 

 

 

작품 속 인물들은 모두 여유없이 살아가는 이 시대의 서민 혹은 그 보다도 못한 사람들이다.

그 중에는 현재의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길 희망하며 하루를 버티는 사람도,

꿈이 있던 순수한 과거를 작은 뿔씨삼아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그 중 제일 마음이 많이 가 읽기 힘들었던 이야기는 마지막에 나오는 「서른」이었다.

나와 비슷한 나잇대에 역시나 비슷한 그저그런 인생을 살고 있는 주인공이

결국에는 돌이킬 수 없는 나락으로 내몰리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기가 힘이 들었다.

 

 

 

 

 

 

이 책을 처음에는 일을 하는 짬짬이 시간날 때 마다 허겁지겁 읽기 시작했는데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집중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읽다가 '이렇게 읽으면 안될 것 같은 책이다.'싶은 생각이 들어 휴일에 다시 맨 앞장부터 읽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게 워낙 문학적인 표현들이 많은 데다 두고두고 곱씹고 싶을 만큼 깊게 다가오는 문장들이 많아서 대충 머리로 이해하고 넘어가고 싶지 않았다.

 

 

 

 

 

소설이 다 끝나고 마지막 「작가의 말」에서 작가는

 

무언가 나를 지나갔는데 그게 뭔지 모르겠다.

당신도 보았느냐고

손가락을 들어 하늘을 가리키지만

그것은 이미 그곳에 없다.

 

무언가 나를 지나갔는데 그게 뭔지 몰라서

이름을 짓는다.

여러 개의 문장을 길게 이어서

누구도 한 번에 부를 수 없는 이름을.

기어코 다 부르고 난 뒤에도 여전히 알 수 없어

한 번 더 불러보게 만드는 그런 이름을.

 

나는 그게 소설의 구실 중 하나였으면 좋겠다.

 

라는 글을 쓰며 책을 마무리한다.

 

 

이 글이 책을 읽는 내내, 그리고 책을 다 읽고 난 뒤에도 계속 내 뒤를 말없이 따라오던 감정과 너무나 똑같아서

왜 내가 책을 처음부터 다시 읽고, 자꾸만 문장들을 곱씹었는지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책을 두 번, 세 번, 아니 스무 번, 서른 번 읽으면 나도 이런 글을 쓸 수 있게 될까.

 

 

 

비행운 - 10점
김애란 지음/문학과지성사
 

 


 

 

 

 

책 속 구절

 

 

고요는 오존층처럼 우리 몸을 보호해주는 투명한 막 같은 거였다. 물이나 햇빛처럼 사람이 사는 데 꼭 필요한. - p.57

 


 

여름은 평소 우리가 어떤 냄새를 풍기며 살아왔느지 환기시켜줬다. 지상에 숨이 붙어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들의 모든 체취가 물안개를 일으키며 유령처럼 깨어났다. - p.87

 


 

세계는 비 닿는 소리로 꽉 차가고 있었다. 빗방울은 저마다 성질에 맞는 낙하의 완급과 리듬을 갖고 있었다. - p.94

 


 

다행인지 불행인지 승객들은 이따금 기옥 씨가 거기 있는 줄 모르거나, 있어도 없는 사람처럼 여겼다. 마치 많은 이들이 재떨이와 재떨이 청소부를, 승강기와 승강기 청소부를 동격으로 대하듯 말이다. - p.200

 


 

그러니까 딱 한 뼘만…… 9센티미터만큼이라도 삶의 질이 향상되길 바랐다. 그런데 이상한 건 그 많은 물건 중 내게 '딱 맞는 한 뼘'은 없었다는 거다. 모든 건 늘 반 뼘 모자라거나 한 뼘 초과됐다. 본디 이 세계의 가격은 욕망의 크기와 딱 맞게 매겨지지 않았다는 듯. 아직 젊고, 벌 날이 많다는 근거없는 낙관으로 나는 늘 한 뼘 더 초과되는 쪽을 택했다. 그리고 그럴 자격이 있다 생각했다. - p.214

 


 

이십대에는 내가 뭘 하든 그게 다 과정인 것 같았는데, 이제는 모든 게 결과일 따름인 듯해 초조하네요. - p.293

 


 

'열심히만 하면 누구나 꿈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하는 오십대 남성의 강의를 들었어요. (…) '꿈'이라는 말을 듣는데 가슴 한쪽이 싸한 게 찌르르 아픈 것도 같고 좋은 것도 같고 심장이 빠르게 뛰었어요. 그리고 실은 제가 아주 오래전부터 그런 말을 간절히 듣고 싶어 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어요. 말 그대로 '교과서에 나오는 말' 같은 거. 올바르고 아름다운데, 실은 아무도 믿지 않는 말들 말이에요. 너무 옳아서 조금은 종교적으로 보이지요? 그런데 언니, 요즘 같은 세상에 열심히만 하면 누구나 꿈을 이룰 수 있다는 말만큼 믿고 싶은 교리가 또 어디 있겠어요. - p.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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